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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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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 태종은 리 왕조의 제2대 황제로, 1028년부터 1054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아버지 리 태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즉위 후 삼왕의 난을 진압하고 참파를 정벌하여 국위를 떨쳤다. 또한 《형서》를 편찬하여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불교를 장려하는 등 내치에도 힘썼다. 그러나 잦은 전쟁과 과도한 세금 부과로 민생을 어렵게 하고, 지나친 불교 숭배로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는 1054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셋째 아들 리 성종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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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태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리 태종 조각상
리 태종의 조각상 (리 바 제 묘)
묘호태종(太宗)
리 펏 마(Lý Phật Mã/李佛瑪)
리 덕 찐(Lý Đức Chính/李德政/이덕정)
존호개천통운존도귀덕성문광무숭인상선정리민안신부룡현체원어극억세공고응진보력통현지오흥룡대정총명자효황제(開天統運尊道貴德聖文廣武崇仁尚善政理民安神符龍見体元御極億歳功高應真宝暦通玄至奥興龍大定聡明慈孝皇帝)
생애
출생전 레 왕조 응티엔 7년 음력 6월 26일 (1000년 7월 29일), 닌빈 성 두옌 닌 사원
사망숭흥다이바오 6년 음력 10월 1일 (1054년 11월 3일), 탕롱 황성, 대구월
매장지토 능(Thọ Lăng)
통치 정보
국가대구월
칭호황제
재위 기간1028년 4월 1일 ~ 1054년 11월 3일 (26년 216일)
즉위1028년 4월 1일
퇴위1054년 11월 3일
선대 군주리 태조
후대 군주리 성종
연호티엔 타인(天成: 1028–1033)
통 투이(通瑞: 1034–1038)
깐 푸 흐우 다오(乾符有道: 1039–1041)
민 다오(明道: 1042–1043)
티엔 깜 타인 부(天感聖武: 1044–1048)
숭 흥 다이 바오(崇興大寶: 1049–1054)
왕조 정보
왕조리 왕조
선대 군주리 태조
후대 군주리 성종
가족 관계
부황리 태조
모후영현황후(Empress Linh Hiển)
배우자영감황후(Empress Linh Cảm, 마이 씨)
왕황후(王皇后)
정황후(丁皇后)
천감황후(天感皇后)
자녀황태자 리 녓 똔 (리 성종)
풍건 공(Prince of Phụng Càn) 리 녓 쭝
빈 즈엉 공주(Princess Bình Dương)
쯔엉 닌 공주(Princess Trường Ninh)
김 타인 공주(Princess Kim Thành)
종교
종교불교

2. 생애

1000년 레호안 왕의 치세 동안 호아루에서 리꽁우언과 레 호안의 딸인 레 티 팟 응언 사이에서 태어났다.[3] 아홉 살 때, 아버지 리꽁우언이 다이꼬비엣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고 수도를 탕롱으로 옮겼다. 1020년, 황태자였던 리 펏 마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참파를 성공적으로 침공했다.[3]

1028년 리 펏 마는 왕위에 올랐다.[5] 즉위 초기에 왕위 계승을 다투는 형제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4] 통치가 안정되자, 리 태종은 파격적인 통치 스타일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하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봄 갈이 의례에서 직접 밭을 갈았으며, 가장 총애하는 후궁 중 한 명을 왕실 지위로 격상시켰다.

1039년, 태종은 훌륭한 통치가 강력한 개인적 리더십에 달려 있는지, 아니면 정교한 제도에 달려 있는지에 대해 신하들과 토론을 벌였다. 결국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부 개혁을 시작했다. 같은 해, 북부 산악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농콴푸를 체포하여 공개 처형했다.

1042년 태종은 《형서》라는 새로운 법전을 만들었다.[12] 당률에서 영감을 얻은 이 법은 "현대 시대에 적합한 것을 숙고"하도록 위임한 관리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1044년, 태종은 군대를 이끌고 해상으로 참파를 침략하여 자야 심하바르만 2세를 살해하고 많은 약탈품을 획득하였다.

1048년, 농찌까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태종은 그를 공격하여 송나라 영토로 몰아냈다.[2]

1049년, 관세음보살이 연꽃 위에 앉아 있는 꿈을 꾼 후 탕롱에 연우사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1][21]

1049년경부터 태종은 세속적인 일에 덜 몰두하게 되었고, 종교를 통해 삶의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1054년에 사망했고, 사망 몇 달 전 통치 업무를 아들인 리녓똔에게 넘겼다.

2. 1. 즉위 이전

전 레 왕조 응티엔 7년(1000년) 음력 6월 26일(양력 1000년 7월 29일), 훗날 리 왕조의 초대 황제가 되는 리꽁우언의 장남[3]으로 전 레 왕조의 수도였던 화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전 레 왕조의 장군이던 리꽁우언이고, 어머니는 전 레 왕조 대행 황제 레호안의 딸 레 티 펏응안(Lê Thị Phất Ngân)이다.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인철(仁哲)에 통달하고 문무를 연마했으며, 육예의 어느 분야에도 통달했다고 한다. 태어났을 당시 머리 뒤에 별똥별처럼 7개의 점이 났다고 전해진다.

1009년 11월 21일(까인투이 2년 음력 11월 2일), 아버지 리꽁우언이 대신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자, 리펏마는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012년(투언티엔 3년) 4월, 황태자 리펏마는 '''개천왕'''(Khai Thiên Vương|hn=開天王vi)으로 봉해졌다.[3] 1019년(투언티엔 10년)에는 원수에 임명되었다.

1020년 12월(투언티엔 11년), 황제는 개천왕에게 참파 정벌을 명하여 용비산(龍鼻山)에서 전투를 벌여 이겼는데, 참파군의 시체가 과반이 될 정도였다. 이후에도 봉주 (1024년, 투언티엔 15년), 연주 (1026년, 투언티엔 17년), 칠원주 (1027년, 투언티엔 18년) 등을 정벌하였다.[4]

2. 2. 삼왕의 난과 황제 즉위

1028년 3월 31일(투언티엔 19년 3월 3일), 리꽁우언 황제가 승하하자 황위를 노리던 무덕왕(武德王), 익성왕(翊聖王), 동정왕(洞征王)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삼왕의 난이라고 한다. 내시(内侍) 리녓응히아(Lý Nhân Nghĩa)의 충언에 따라 군사를 출병시켜 진압하였다. 관군인 레풍히에우(Lê Phụng Hiểu/黎奉曉/여봉효)가 전투 중에 무덕왕의 말을 잡아 낙마시켜 살해하였으며, 반란군의 기세가 꺾여 반란을 진압하였다.[4][6]

리 펏마1028년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리 펏마는 동생들을 토벌하는 것을 주저했지만,[5] 리 녓 응히아 등의 진언을 받은 후 레풍히에우에게 명하여 궁중 호위를 통해 무덕왕을 토벌하고 나머지 두 명을 몰아내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동정왕과 익성왕은 투항하여 용서를 구했고, 리 펏마는 그 죄를 용서했다.[5]

리 태종은 즉위 후 문무 백관으로 하여금 매년 동고 신묘에 참배하여 충효를 맹세하게 하고, 위반자는 장형에 처했다.[5] 즉위 직후 고향인 장안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동생 개국왕 리보를 항복시키고 동정왕과 익성왕과 마찬가지로 그 죄를 용서했다.[8]

1029년(천성 2년) 의 인종으로부터 교지군왕에 봉해졌다.[3]

2. 3. 통치와 업적

리 태종은 초기에는 아버지 리 태조의 고문들에게 의존하여 통치하였으나, 점차 독자적인 통치 스타일을 보였다. 1034년, 연호를 통투이(通瑞)로 변경하였다.[2] 1038년에는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을 행하였고[3][11], 로부터 남평왕(南平王)으로 책봉되었다.[2][9][10]

1039년, 농전복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가 세운 장생국(長生國)을 멸망시켰다.[14] 이후 농전복의 아들 농지고는 도망쳤다. 같은 해, 연호를 깐푸흐우다오(乾符有道)로 변경하였다.

1042년, 연호를 민다오(明道)로 변경하고, 《형서(刑書)》를 편찬하여 법률을 재정비하였다.[12] 이는 베트남 최초의 성문 법령집으로, 당률의 영향을 받아 관리의 뇌물 수수를 금지하고, 십악을 제외한 죄에 대해 벌금으로 속죄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백성들에게 보다 명확하고 관대한 법 적용을 목표로 했다.[5][13]

1043년, 참파의 침입을 격퇴하고, 참파 정벌을 준비하며 전함 수백 척을 건조하였다.[3] 1044년, 참파를 정벌하여 참파왕 자야 심하바르만 2세를 죽이고, 왕도 비자야를 점령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12][18][19][20] 같은 해, 연호를 티엔깜타인부(天感聖武)로 변경하였다.

1048년, 농지고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태위 곽성이에게 명하여 진압하게 하였다.[2] 1049년, 연호를 숭흥다이바오(崇興大寶)로 변경하였다.

리 태종은 불교를 장려하여 많은 사원을 건립하였다. 특히 1049년에는 관세음보살의 꿈을 꾸고 연우사(一柱寺)를 창건하였다.[1][21]

연우사

2. 4. 형법 개혁

1042년, 리 태종은 당나라의 법을 본떠 《형서》(刑書)를 편찬하였다. 이 형서는 리 왕조 법률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후 베트남 왕조의 법률에도 영향을 주었다.[1] 는 현존하지 않지만, 출판 후 몇 달 이내에 작성된 아홉 개의 칙령이 남아있다.[5]

2. 5. 참파 정벌

1043년, 참파의 해적들이 대구월의 해안가를 침범하여 백성들을 약탈하였으나, 태종은 이를 신속하게 평정하였다.[5] 같은 해, 태종은 참파 해적의 침범을 이유로 참파 정벌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5] 1044년 3월 12일, 태종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참파를 정벌하러 출전하였다.[5] 이틀 후, 참파에 주둔하던 대구월 군대가 참파왕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방심한 틈을 타 기습하였고, 참파는 방어에 실패하여 참파왕 자야 심하바르만 2세가 죽임을 당했다.[5] 이로써 참파와의 전쟁에서 대구월 군대가 승리하였다.[5]

이 전쟁에서 대구월은 5,000명의 포로, 훈련된 코끼리, 금, 옥, 기타 보물 등 상당한 양의 약탈품을 획득하였다. 참파 포로들은 응에안에 정착하여 참파식 마을에서 살았고, 왕실 엘리트의 개인 하인이 되거나 종교 시설에서 노동했다.

2. 6. 농지고의 난

1052년 4월, 농전복의 아들 농지고(儂智髙)가 반란을 일으켰다. 농지고는 대남(大南)이라는 나라를 세워 황제를 칭하였다. 건국 후, 송나라 국경을 넘어 횡산(横山)의 목책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여러 지역을 정벌한 끝에 광주성(廣州城)에 진입하였다. 농지고는 옹주(邕主)에 입성하여 송나라 사람 3천여 명을 살해하고 성을 불태웠다.[2] 이후 송나라는 이 사건으로 근심하였으나, 송 인종은 적청(狄青)과 항장(抗章)을 농지고 토벌을 위해 광주로 보냈다.

1053년 1월, 장수 적청과 군사들은 농지고 일파와 전쟁을 벌이려 했지만, 농지고가 전쟁을 거부하자 패전하는 척하며 십여 리를 후퇴하였다. 이후 농지고 일파는 송군 함정에 빠져들어 군인 57명이 몰살당하였다. 이때 송군이 죽인 대남군은 2,200여 명이 된다. 10월, 적청의 군대는 농지고의 군대를 포위하여 전투를 벌였으며, 이때 송군이 이기면서 농지고 일파는 대리국(大理國)으로 도망쳤다. 대리국으로 도망치던 중 농지고는 목이 베였으며, 그 수급은 송나라에 바쳐졌다. 이후 농지고 일파와 가족은 전부 몰살되었다.[2]

2. 7. 죽음

숭흥다이바오 6년(1054년) 7월,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하고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다.[5] 그 해 10월 1일(1054년 11월 3일), 승룡의 장춘전(長春殿)에서 55세로 붕어하였다.[5] 박닌 성 투선시 딘방의 수릉에 묻혔고,[1] 셋째 아들 개황왕 리 녓톤(리 성종)이 제위를 이었다.[5]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현경왕(顯慶王)
조모명덕태후|明德太后vi 팜티(Phạm Thị)
부친태조 리꽁우언(Lý Công Uẩn)
모친영현황태후|靈顯皇太后vi 레 티 펏응안(Lê Thị Phất Ngân)
황후금천황태후 마이 티(Mai thị) 외 6명기록 미비[25]
황자리녓똔(Lý Nhật Tôn) 외 3명2남은 요절.[27]
황녀평양공주(Bình Dương Công Chúa) 외 2명[28][29][30]



금천황태후|金天皇后중국어 마이티의 부친은 안국상장 매우이다.[26]

정황후의 부친은 광국상장 정오상이다.

왕황후의 부친은 보국상장 왕두이다.

천감황후|天感皇后vi는 성씨가 미상이다.


  • 자녀
  • * 개황왕 리일존|李日尊vi(태자, 금천황후|金天皇后중국어 소생, 제3대 황제 성종)[27]
  • * 봉건왕 리일중|李日中vi
  • * 평양공주 - 諒州중국어 목사인 신소태(申紹泰)에게 시집감[28]
  • * 장녕공주 - 상위주 목사인 하선람에게 시집감[29]
  • * 금성공주 - 봉주 목사인 여성순에게 시집감[30]

4. 평가

리 태종은 리 왕조의 기틀을 다진 군주로 평가받지만, 잦은 전쟁과 반란 진압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었다는 비판도 있다. 특히 유학자들은 태종이 불교에 심취하여 농지고를 여러 번 용서한 것을 비판하였다.

대월사기전서』는 태종에 대해 "그 심모는 후한 광무제에 필적하고, 사방을 정벌한 것은 태종에 비견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오사련은 "부도의 자애로운 설(불교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반역 신하를 사면한 것은 일시적인 인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으며, 레 반휴는 "불씨의 소인에 빠져 유국의 대의를 잊었다"고 비판했다.[1]

4. 1. 긍정적 평가

리 태종은 삼왕의 난[4], 농전복[14], 농지고[15]의 난 등 국내외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왕조의 안정을 확립하였다. 참파 정벌[18][19]을 통해 남쪽 국경을 안정시키고 국위를 선양하였다.

1042년에는 《형서》[12]를 편찬하여 법치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고, 베트남 법제사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는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성문화된 법령집으로, 관리의 뇌물 수수를 금지하고[3], 반란죄 등의 십악을 제외하고[13] 형벌에 해당하는 벌금을 지불함으로써 죄를 속죄할 수 있도록 하였다.[5]

불교를 장려하고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3] 1049년에는 관세음보살이 연꽃 위에 앉아 있는 꿈을 꾼 후 탕롱에 일주사(연우사)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1][21]

대월사기전서』에서는 "그 심모는 의 광무제에 필적하고, 사방을 정벌한 것은 의 태종에 비견된다"고 격찬하였다.

4. 2. 부정적 평가

태종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그의 통치 방식과 관련된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 잦은 전쟁과 과도한 세금: 태종은 재위 기간 동안 참파, 애뢰 등 주변국을 상대로 잦은 전쟁을 벌였다.[1] 이러한 군사 활동은 국력을 소모시키고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민생을 어렵게 만들었다.[8]
  • 불교 편향과 유교적 통치 이념과의 괴리: 태종은 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국정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보였다.[3] 연우사 건립[1] 등 불교 관련 사업에 많은 자원을 투입하였으며, 이는 유교적 통치 이념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반란을 일으킨 농지고를 여러 차례 용서한 것은 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1] 오사련은 이를 "부도의 자애로운 설(불교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반역 신하를 사면한 것은 일시적인 인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1] 레 반휴는 "불씨의 소인에 빠져 유국의 대의를 잊었다"고 비판했다.[1]

참조

[1] 서적 『大越史記全書』本紀巻之二 李紀 太宗皇帝
[2] 서적 『越史略』巻中 阮紀 太宗
[3] 논문
[4] 논문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위키문헌 Việt Nam sử lược/Quyển I/Phần III/Chương IV
[9] 위키문헌 『宋史』巻四百八十八 列伝巻第二百四十七 外国四
[10] 논문
[11] 논문
[12] 논문
[13] 논문
[14] 논문
[15] 논문
[16] 논문
[17] 논문
[18] 논문
[19] 논문
[20] 논문
[21] 논문
[22] 논문
[23] 논문
[24] 서적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본기 제2권
[25] 인물 영감황태후(靈感皇太后)
[26] 인물 안국상장(An Quốc Thượng Tướng/安國上將) 마이흐우(Mai Hựu/枚祐/매우)
[27] 인물 황태자(皇太子)
[28] 인물 턴티에우타이(Thân Thiệu Thái/신소태/申紹泰)
[29] 인물 하티엔람(Hà Thiện Lãm/何善覽/하선람)
[30] 인물 레똥투언(Lê Tông Thuận/黎宗順/여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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